누가 내 이웃입니까?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영생을 어떻게 얻습니까?"
그러자 "율법에 어떻게 기록되었느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그렇게 해라. 그래야 영생을 얻는다."
사랑과 구원은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랑'을 말하면서 예수님이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어떻게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되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특징은 내 중심이 아니고 내가 사랑해야 하는 대상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 이웃 중심입니다.
이에 대하여 약간 의구심을 갖고 있었던 율법교사가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 사람은 사랑해야 함을 알았지만, 그 중심에 자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이웃의 경계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한 비유를 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일을 보고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 길을 세 사람이 지나갑니다.
한 사람은 제사장이요, 다른 사람은 레위인이요, 마지막은 사마리아인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갑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그를 데리고 치료하고 살려줍니다.
예수님이 다시 묻습니다.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던 자가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묻는 율법교사에게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이웃은 네 자신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교사는 자기를 중심으로 사랑해야 할 이웃을 찾았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니, 그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사장의 입장에서 보면, 거의 죽어가는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게 되어 율법을 어기게 되므로 구할 수 없습니다.
레위인도 성전 봉사하러 가야 하는데 시간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대답합니다. "너는 자기중심적으로 사랑을 생각하고 있구나! 사랑은 그게 아니야!"
내 중심적으로 이웃을 찾으려고 할 때, 내가 사랑해야 할 대상에 대하여 스스로 경계를 설정합니다.
그러다보면, 사랑해야 할 사람,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은 이미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중심에 두고 이웃을 찾고 있는 율법교사에게 그 중심을 ‘강도만난 자’에 두라고 하십니다.
강도만난 자는 유대인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거의 원수처럼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그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었던 것은 자기중심으로 상대를 보지 않고,
상대방을 중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원수까지도 품을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원수처럼 지낸 사마리아인이 그 사람을 구해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은 중심을 누구로 두느냐의 문제입니다.
이웃은 상대방이 아니라 바로 내가 이웃입니다.
강도 만난 자가 중심이 될 때, 내가 그의 이웃이 될 것인가? 나는 그의 이웃이 되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나 중심적인 사랑이 아니라 타인 중심적인 사랑이 예수님의 말씀하신 사랑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러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중심으로 사랑했다면, 과연 인간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가 있었겠습니까?
하나님 기준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을 설정하고, 경계를 정하면 어느 누구도 사랑 받을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초점은 대상인 인간을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아들을 인간의 몸을 입혔습니다.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율법적인 사랑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로 묻습니다.
내가 중심이 되면, 내 중심으로 이웃(사랑할 대상)을 정하고, 사랑의 정도를 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상이 중심이 됩니다.